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나중에 스웨덴 국왕 [[칼 9세]]가 되는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과 홀슈타인-고토르프의 크리스티나[*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의 초대 공작 아돌프의 둘째딸. 아돌프는 [[덴마크-노르웨이]] [[덴마크 국왕|국]][[노르웨이 국왕|왕]] [[프레데리크 1세]]의 막내아들로 훗날 스웨덴과 러시아 제국의 왕조가 되는 [[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]]의 시조이다.]의 맏아들로, 스웨덴의 독립 시조 [[구스타브 1세 바사]]의 손자였으며 외가로는 [[덴마크-노르웨이 왕국|덴마크]] [[올덴부르크 왕조|올렌보르 왕조]]의 피를 이어받았다. 칼 9세가 덴마크와의 전쟁 중 뇌졸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16세의 어린 나이에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. 문제는 부왕으로부터 스웨덴 왕위와 동시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개판이 된 스웨덴의 외교 상태도 물려받았는데 1611년 당시 스웨덴은 그야말로 사방이 적이었다. 당장 덴마크-노르웨이 국왕 [[크리스티안 4세]]와 핀마르크 지방 문제를 두고 칼마르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, 칼 9세가 조카이자 구스타브 2세에게는 사촌형이 되는 [[지그문트 3세 바사|시기스문드]]의 스웨덴 왕위를 찬탈해 즉위한지라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와도 적대관계였던데다가, [[루스 차르국]]의 [[혼란 시대]]에 개입하는 바람에 루스 차르국과의 외교 관계도 망가진 상황이었다.[* 참고로 칼 9세가 [[바실리 4세]]를 구원하기 위해 원병을 보내면서 지그문트 3세가 혼란 시대에 직접 개입했다. 결국 혼란 시대에 개입해서 루스 차르국과의 관계도 망가지고 폴란드-리투아니아와는 이중으로 사이가 벌어진 셈.] 이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 개혁에 착수하는 동시에, [[30년 전쟁]] 중반부터 참전하여 그 능력을 발휘하여 위기에 몰렸던 개신교 세력을 구원했고 [[합스부르크 가문]]을 위협했다. 그러나 1632년 [[뤼첸 전투]]에서 피콜로미니의 기병 돌격에 자신이 신임하던 청색 연대가 붕괴되고 [[스웨덴군]]이 위기에 몰리자 이를 수습하다가 피콜로미니의 기병에 의해 전사하였다. 전투 자체는 [[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]]의 오판으로 스웨덴군이 승리했지만 국왕과 정예병을 상당수 잃어버린 스웨덴의 손실은 뼈아팠다. 아들을 남기지 못해 딸이 [[크리스티나 여왕]]으로 즉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